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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호승 칼럼> 명분과 실리 |
2020년11월04일(Wed) |
| 양호승 전광일보 발행인 |
임진왜란 때의 임금 선조는 영명한 통치자는 못되었다.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리는 인텔리 청년에 불과했고, 잘못도 많았으나 천성은 총명해서 현명한 결단을 내린 경우도 가끔 있었다.
그 중에는 지금 생각해도 일대영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 난리가 일어난 해 10월, 정부가 의주에 피난했을 때의 일이다. 적의 포로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에 대해서 의견이 갈라졌다.
남의 나라를 무단히 침범한 왜놈들은 모조리 죽여 없애야 한다는 것이 일반의 국민감정이었고, 고관들은 중국에 넘겨 그들의 환심을 사자는 의견이었다.
이 무렵, 압록강 저편에 있는 중국 관원들은 장차 자기들의 강토까지 집어 삼키겠다는 왜놈들이란 도대체 어떤 종자들인지 궁금했다. 무시로 강을 건너 와서는 동물원의 잔나비를 구경하듯 이리 저리 뜯어보고 돌아갔다. 한 걸음 나아가 이 신기한 섬나라 포로들을 자기들에게 넘겨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북경의 중앙 정부에 보낼 선물로는 색다른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고관들은 이점에 착안하여 그들의 소망대로 포로들을 인도하여 비위를 맞추자는 것이 대세였다. 비위를 맞춰두는 것이 앞으로 무력 지원을 얻는 데도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조는 죽이는 데도 반대였고, 중국에 넘기는 데도 반대였다.
‘사로잡은 포로들을 죽인다고 보탬이 될 것이 없고, 중국에 보낸다고 보탬이 될 것이 없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로부터 총을 만드는 법과 사격하는 법을 배우고, 적정을 자세히 물어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 또 검술을 하는 자들로부터는 그 방법을 배워 연습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국민의 적개심이 극도에 달했고, 선조 자신도 일본이라면 이를 갈고 있을 때에 이 같이 냉정한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우리 국토를 잿더미로 만들고 국민을 닥치는대로 학살하는 적을 선생으로 모시고, 그들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이른바 명분론자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이들을 누르고 실리를 취했다.
전쟁이 일어난지 불과 몇달 후에 일본의 조총과 같은 총을 만들어 내고, 그들의 전술을 익히고, 임란 20여년 후에 일어난 정묘호란에 일본군 포로들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출전시킬 수 있었던 것도 선조의 옳은 판단의 결과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부터 누구에게서나 배울 것은 배우려던 이 같은 기풍은 사라지고, 또 다시 공허한 명분론이 판을 쳤다.
일제시대에도 만사에 이 명분이 기준으로 되었다. 폐일언하고 못된 일본 사람들에게서는 배울 것이 없고, 그들로부터 배우려는 사람이 있으면 친일분자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이채로운 것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바로 그 고문 경관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동지들을 타일렀다. “침식을 잊고 밤을 새워가면서 취조하고 조서를 작성하는 자들의 헌신적 노력을 보라. 저들의 입장으로는 그것이 국가에 대한 충성이다. 우리는 이런 자세를 배우자”고 했다.
그러나 도산 선생의 주장은 개인 플레이에 그쳤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만사에 명분이 뿌리깊은 기준으로 남아 있다. 일례로 배우, 음악인, 경제인에서 기술자에 이르기까지 각기 그 전문분야의 연도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생활, 행동거지 같은 동떨어진 기준으로 판정을 내린다. 일례를 들면 아무리 뛰어난 기술자라도 거만하다고 점이 찍히면 안된다. 기계를 만드는데 거만과 기술이 무슨 상관일까.
명분만으로 전쟁이나 국제경쟁에 이긴 선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 현실을 알기에 선조와 도산 선생의 냉철한 계산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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