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은 두 번의 백의종군을 당했다. 첫 번째는 1587년 10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다. 여진족이 함경도 경흥부의 녹둔도에 침입해 조선군 11명을 살해하자 조정은 둔전관이던 이순신의 책임을 물어 백의(를 입게 한다. 이순신은 이듬해 1월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려 석 달 만에 사면, 복직된다.
임진왜란 중에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는 어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1597년 4월1일부터 8월2일까지 백의종군을 한다. 이순신은 원균이 이끈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당하자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해 소임을 다한다.
조선시대 백의나 포의는 벼슬이 없는 사람을 뜻했다. 백의종군은 자의에 의한 결정이 아니었다. 조정에서 내리는 처벌 가운데 낮은 단계에 속했다. 무과 과거급제자의 신분은 유지시키되 어떠한 관직도 없이 군문에 종사케 하는 처분이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중 권율 장군의 군사고문 역할을 했다. 백의종군은 공을 세우면 원직복귀시킨다는 점에서 패자부활의 가능성을 열어둔 인사 시스템이었다. 죄와 벌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적 처분이 아니라 중간지대를 둠으로써 인재를 쉬이 버리지 않으려는 배려가 담겨 있다.
백의종군이라는 표현은 후대에 스스로 계급장을 떼는 것처럼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기득권을 내려놓되 맡은 소임을 다한다는 의미에서 대동소이한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핵심 측근인 이학재 새누리당의원이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대통령직인수위를 포함해 새 정부에서 일체의 임명직을 맡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는 “박 당선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힘을 보탰고 그 뜻을 이룬 만큼 이제 국회의원이란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재선인 그는 2010년 8월 이래 사실상 박 당선인의 비서실장이었다. 의원급 중에선 박 당선인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사람이란 의미다. 그런 그가 기득권을 내려놓겠다고 한 것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백의종군 선언은 대체로 아쉬운 처지에서 나오곤 했다. ‘동교동계 7인의 맹약’으로 불리는, 권노갑·한화갑 등 DJ 측근 7명이 임명직을 맡지 않겠다고 한 건 대선을 3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 밖의 경우는 대개 퇴진 압박 속에서 이뤄졌다. 이 의원의 선언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새로 출범하는 정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대선 승리 직후 당선인 주변의 논공행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하다. 역대 인수위 출신 중 68.5%가 고위직으로 기용됐다지 않는가. 일종의 예비 내각이니 인수위 때부터 체면이고 뭐고 없이 경쟁한다. 선거 공신 중엔 당선인에게 대놓고 “○○장관이 되고 싶다”고 한 경우도 있었다. 결국 자리싸움이 벌어지고 이게 권력투쟁의 씨앗이 되곤 했다.
대선 캠프 출신이란 게 일종의 권력 카르텔로 작동하기도 한다. 대통령에 대한 높은 충성심과 이해도를 바탕으로 비 캠프 출신을 소외 또는 배제시키기 일쑤였다.
이것이 대통령의 의지를 관철하는 데 도움이 됐을는지 모르지만 능력 있는 인재들을 발탁하는 데, 또 믿고 일을 맡기고 소통하는 데도 방해됐다. ‘끼리끼리’ 문화는 쉽게 비리의 온상으로 변질된다. 공사 구별이 모호해져 집중적 로비에 무너지기 십상이다. 역대 대통령의 임기 말을 고통스럽게 했던 측근 비리를 떠올리면 될 듯하다.
이제 ‘박근혜 당선’이 아닌 ‘박근혜 정부 성공’을 새로운 인사의 잣대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2, 제3의 이학재 의원이 나오길 기대한다. 더 많은 친박 정치인들이 백의종군 선언에 동참해야 한다. 박근혜 당선인이 ‘정치적 빚’을 의식하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인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박 당선인이 약속한 대탕평을 위한 전제이기도 하다. 그동안 친박을 둘러싼 폐쇄적인 이미지도 말끔히 걷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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