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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천민 |
2011년03월16일(Wed) |
| 안용호<논설위원, 전 광주시교육청 장학담당장학관> |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반에 종태라는 친구가 있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하인이라 놀림의 대상이었는데 졸업 후 서울로 가서 엿장수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도 조선의 천민에 대한 잔재가 일부 남아 있었다. 조선시대 500년 내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최근세까지 사람들의 뇌리에 멸시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사람들, 즉 노비, 무당, 백정, 광대, 상여꾼, 기생, 공장 등인데 그들을 일러 조선 팔천이라고 했다.
조선의 양반들은 함께 살아가야 할 일부에게 노예의 굴레를 씌우고 그 신분을 유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짐승처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증식하는 범죄까지 저질렀다. 이런 것을 분석한 미국의 학자 제임스 팔레는 16세기경 조선 전체 인구 가운데 30%가 넘는 150만여 명이 노비인 것을 보고 조선 사회를 노예 사회로 규정하기도 했다.
인도의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그리고 불가촉천민을 비아냥거리고 일본의 부라쿠민이나 유럽의 집시를 입에 올리는 우리지만 천민에 대한 차별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고 거주 지역도 따로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양천제를 바탕으로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이라도 천인이 있으면 천인으로 삼는다는 일천측천 규정을 강력하게 밀어 부쳤다.
그 결과 양반, 중인, 양인, 천인의 계급사회는 점점 고착화 되어 갔다. 피지배계급의 고혈을 바탕으로 무위도식하던 양반사회의 균열이 오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에 의해서 천민의 해방은 이루어졌다. 1886년에 선포된 신분세습제 폐지와 1894년의 신분제 폐지를 통해 한반도 병탄의 기반을 구축하려는 일본의 야심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노비의 생활이 어땠느냐를 알아보려면 송익필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노비가 신분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바늘 구멍만큼이나 좁았지만 역모를 고변하거나 뛰어난 학문으로 바늘귀를 통과한 인물이 종종 있었다. 그 중 조선의 8대 문장가이며 김시습, 남효온과 더불어 산림 삼걸로 불리는 송익필은 이름이 유난하고 그 삶이 드라마틱하였다.
송익필은 전라북도 여산 출신으로 고려시대 무인이던 송예의 10대손이다. 1534년 2월 10일 지금의 청와대 터인 한성 대은암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인 인필, 부필, 한필도 문장에 뛰어났다. 하지만 이들의 앞길은 막막했다. 그의 할머니가 전 성균관 사례 안돈후의 비첩 중금의 소생인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얼자인 그의 아버지 송사련은 기묘년에 음양과를 거쳐 5품직인 관상감 판관이 되었지만 그 이상의 신분상승은 불가능했다. 남몰래 신분의 한계를 곱씹던 송사련은 1521년 ‘신사고변’을 통해 외숙인 안당가문을 초토화시키고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
그 덕에 익필 형제는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 사대부 집안과 혼인할 수 있었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이이, 성혼, 정철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송익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명정을 맡은 이이가 친구지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비막덕지구’ 라고 씀으로써 익필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문정왕후가 죽은 후 훈구세력이 추출되고 명종의 뒤를 이어 선조가 보위에 오르면서 53세가 된 송익필의 주변 정치 상황도 급변했다. 안당 집안의 소송제기와 이발의 공작으로 과거 송사련이 고변한 안당 가문의 역모가 무고로 밝혀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송사련의 자손들이 안씨 가문의 노비라는 판결까지 나온 것이다.
여기서부터 송익필의 숨바꼭질 같은 삶이 펼쳐진다. 숨고 도망가고…. 궁지에 몰린 송익필은 정철의 도움으로 전라도 광주로 내려가 19세의 김덕령을 가르치기도 했다. 송익필의 처분이 부당하다는 상소도 소용없이 조정의 동인들은 그를 그냥 놔두지 않고 잡아다가 1591년 평안도 회천으로 유배를 보낸다. 1593년 풀려났지만 전국을 유랑하다가 충청도 면천에 정착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제자를 기르게 된다. 김장생이 그의 제자이며 김장생의 제자가 송시열이다. 살아서는 이이나 성혼 그리고 정철의 상소를 조종하여 정국을 흔들었고, 죽어서는 그의 곧음의 성리학을 김장생과 송시열이 이어받아 조선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너무나 파란만장했다. 1598년 아들 송취대가 수습해 준 서간을 묶어 ‘구봉집’이라는 문집을 내고, 1559년 충청도 당진의 마양촌에서 향년 66세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송사련이 외족을 멸하면서라도 면하고 싶어 했던 노비신세를 면하지 못한 채.
오늘도 우리들의 마음 속에 도도히 흐르는 천민의식의 강에 빠져, 현대판 팔천이 되지 않도록 인격 완성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고, 남이 싫어하는 일이나 듣기 싫은 소리는 절대 하지 않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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