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부부는 “앞을 못 보니 아가씨가 대신 자선남비에 넣어달라”며 1만원을 건넸다. 엄마 손을 잡고 온 어린이는 100원짜리 동전 무더기와 1000원짜리 몇 장이 든 비닐봉투를 꺼냈다. 저금통을 털어온 돈이다. 매일 100원짜리 동전을 넣는 장애인도 있었다. “불황이 사람 마음까지 얼어붙게 할 순 없다는 걸 실감했어요” 구세군 자선냄비 자원봉사에 나선 여대생 얘기다.
자선냄비를 끓게 하는 것은 구세군 목회자 ‘사관’ 708명과 자원봉사자 3만여 명의 힘이다. 재미동포 팝페라 가수 이사벨은 앨범 녹음하러 입국했다가 15일간 광화문과 강남 자선냄비 앞에서 노래로 봉사했다. “1000원 냈던 신사가 제 노래를 듣더니 1만원을 더 내더라”고 했다. 270개 냄비 중 모금액이 가장 많은 곳은 서울 강남 포스코 앞, 하루 300만원이 넘는다. 명동역과 강남터미널도 200만원을 웃돈다.
우리나라에 자선냄비가 처음 걸린 것은 흉년과 수해로 걸인이 들끓던 1928년이었다. 스웨덴 출신 조셉 바아(한국명 박준섭) 구세군 사령관은 12월 15일부터 연말까지 종로 등 20곳에 가마솥을 내걸어 848원67전을 모았다.
이 돈으로 급식소를 열어 걸인들에게 매일 밥과 국을 주고 쌀과 솜옷도 나눠줬다. 자선냄비가 무쇠솥에서 양은냄비, 쇠냄비로 바뀌어가면서 모금액은 1986년 1억원, 작년엔 30억원을 넘었다.
1865년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스가 런던에서 기독선교회를 만든 뒤 1878년 군대 조직으로 바꾼 게 구세군이다. 1908년 우리나라에 첫 교회가 섰고 구한말 군대계급을 본떠 목회자는 사관, 장로는 정교, 집사는 부교, 교회는 영문이라 부른다. 나라마다 한 명씩인 사령관의 계급은 부장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끝난 자선냄비가 매서운 경제 한파 속에서도 사랑의 냄비는 끓어 넘쳤다. 구세군 자선냄비의 모금액이 올해 목표인 32억원을 훌쩍 넘어 35억2천여만 원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역대 최고였던 지난해의 30억9696만원보다 14%가량 늘어난 액수다. 경기가 최악인 상황에서 기업과 단체의 기부가 지난해보다 10% 이상 줄었는데도 성금 총액은 목표를 초과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뭉칫돈보다는 쌈짓돈으로 성의를 보탠 아름다운 손길들이 많았던 덕분이다. 어려울수록 정을 나누고, 위기일수록 힘을 합치는 우리 국민의 저력을 보여주는 훈훈한 소식이다.
구세군의 빨간 냄비는 불황일 때마다 더욱 뜨겁게 달궈지곤 했다. 이는 수많은 소액·익명의 기부자들이 만들어낸 ‘작은 기적’이라고 하겠다. 이들 덕에 우리는 이미 외환위기가 닥쳤던 1997년에도 모금액이 목표인 12억원을 초과해 13억원이 걷히는 ‘이변’을 경험했다.
자선냄비뿐만 아니라 각종 모금창구에도 작은 온정이 눈처럼 쌓이고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진행 중인 ‘희망 2009 나눔 캠페인’도 조그만 손길이 큰 힘이 되고 있다. 개인 기부가 늘어난 덕에 대형 기부는 줄었지만 모금액이 지난해보다 크게 밑돌지는 않고 있다고 한다.
이름없는 이들의 작은 손길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희망의 큰 불길을 이루고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크고 거창한 것들만이 아니다. 작은 온정이 사회를 덥히고, 이름 없는 손길이 미래를 밝힌다.
대부분의 소액 기부자들은 없는 가운데서도 자신보다 더 못한 이들을 위해 주머니를 열었다. 경제 위기의 찬바람 속에도 이웃을 생각하는 온정은 얼어붙지 않았음을 이들은 보여주고 있다.
‘빨간 냄비의 기적’을 만든 수많은 작은 손길이 있는 한 우리 사회는 겨울 한파에도 춥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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