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순(59)씨가 제18대 KBS 사장으로 취임했다. 고무적이다. 그것은 KBS가 공영방송으로 출범한 지 35년 만에 첫 내부출신 사장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8월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S본관 스튜디오에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해 비전을 제시했다.
이 신임 사장은 “지난 1977년 최고의 기자가 되겠다며 KBS에 첫 발을 들여 놓은 지 31년이 흐른 오늘 KBS는 오랜 염원을 이뤘다”고 말했다. 이어 경영원칙을 제시했다. 이 사장은 가장 시급한 과제로 방송의 공정성과 중립성 확립을 꼽았다. “KBS는 지난 몇 년 동안 공정성과 중립성 시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공정성을 잃을 경우 KBS가 어렵게 쌓아올린 국민적 신뢰는 한순간에 추락하고 공영성 여부까지 문제될 소지가 클 뿐더러 나아가 정보의 왜곡으로 민주주의의 발전까지 저해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KBS는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될수록 이해 당사자들의 주장을 보다 균형 있게 보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 사장은 “시청자 여러분과 나의 확고한 신념과 철학으로 최선을 다해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제 1980년의 방송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오후 9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뉴스의 첫머리는 ‘전두환 대통령은’이었다. 아무리 중요한 소식도 대통령 관련 기사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다.
방송국에 경찰과 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의 직원이 상주하던 시절이니 땡전뉴스는 당연히 정부 주문이었지만 노태우 대통령 시절까지 저항없이 꾸준히 유지될 수 있었다. 그것은 뉴스를 통해 정부와 대통령에게 잘 보이길 원하는 구성원들이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나서 주었기 때문이다.
언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1980년대에는 정부와 등을 돌리면 쫓겨날 뿐 아니라,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비겁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아니었다.
당시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을 잡아가고 고문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적극적인 친정부를 하지 않았다고 면직시킨 일은 없었다. 그저 한직으로 이동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조직 내에서 요직을 차지하기 위해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정부 찬양은 방송에서 계속됐다.
방송은 땡노(노태우 대통령) 시절과 땡김(김영삼 대통령) 시절을 거쳐 매우 느리게 적극적인 친정부 의식을 벗어났고 그나마 정부 정책에 반발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 때가 처음 아닌가 싶다. 이제 KBS가 옛날로 돌아갈지 새로 공영방송의 길을 개척할지는 구성원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제 현 정부의 방송장악 의도 같은 정치적인 측면은 차치(且置) 물론하고 다만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을 이병순 KBS 체제에 대해 몇 가지 주문하고자 한다.
첫째, KBS는 언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저널리즘의 본질인 진실성·시민에이 충성·자율성을 회복해야 한다. 진실성은 부분적 진실이 아닌 ‘종합적 진실’을 의미한다. 보도 전체가 하나의 진실을 말해야 한다.
둘째, KBS는 방송통신위원회에 음란·폭력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도록 건의해야 한다. 그것은 방송계의 하드웨어는 커졌지만, 그 속에 담긴 정신과 제도, 운영 등 소프트웨어는 제자리에 있는 ‘문화 지체’ 현상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셋째, KBS는 반드시 이제부터라도 공영방송으로서 정치적으로 중립하고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앨런 포웰 경이 사장으로 재직 시 영국 BBC의 2차 세계대전 방송은 ‘영국 정부에 따르면’으로 시작했다. 올림픽에서 메달 하나만 따도 ‘고국에 계신 국민여러분, 해외 동포 여러분, 우리 조국이 드디어… 등등으로 호들갑을 떨어대는 방송이 아니었다. 국가의 운명을 건 독일군과의 치열한 전투 상황을 정말 중립적으로 보도한 것이다. 이른바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중용지도(中庸之道)’가 그것이다.
우리 언론이 자신의 이념과 논지(論旨)에 맞는 사실은 크게 보도하고, 맞지 않는 사실은 축소 보도하고 있다. 이런 캠페인 저널리즘 혹은 성전(聖戰)저널리즘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KBS 당국은 밥그릇 때문에 정론(正論)을 포기하면 그것은 이미 언론이 아님을 십분 인식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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