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정치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자유롭고 공정한 여덟번의 대통령선거와 아홉번의 국회의원 선거를 치러왔지만 정치인들과 정치에 대한 국민의 인식은 선거를 거듭하면 할수록 더 큰 실망과 불신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를 어찌 설명할 것인가. 우선 독립운동기에 비롯된 이데올로기 시대의 분열을 시작으로 남북분단, 6·25전쟁 등 70여 년에 걸친 체제대결을 겪으면서 국민들이 쌓아온 다양한 경험들이 이념적 분열의 정치문화를 고착시킴으로써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생산적 정치가 발붙일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 같은 정치실패의 원인이 개인이 아닌 체제의 한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권력구조의 개혁과 같은 시스템 개조보다는 단번에 만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환상적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는 전통적 정치문화도 데모크라시(democracy)의 침체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막연한 희망은 오늘의 데모크라시의 시대에서는 몽상에 불과하다.
지금은 국제정세와 역사의 방향을 꿰뚫어보는 비전, 매사에 공익을 앞세우고 서민들의 말을 경청하는 도덕성, 그리고 국가경영의 전문성을 지닌 새 시대적 정치리더십을 만들어내는 것이 당면한 과제다.좌파건 우파건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정치인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왜 우리는 세금을 내 급여를 주면서 실망을 사야만 하는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권력과 책임을 한 사람에게 떠맡기는 우리 한국의 대통령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지난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를 통한 정치과정이 대결과 분열을 한층 심화시키는 이전투구로 전락한다면 한국 민주정치의 정통성과 가능성은 더욱 위축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 한나라 괴리영 주운은 성제가 높이는 승상 장우를 간신이라면서 자신에게 상방참마검을 빌려주면 목을 베겠다고 극간했다. 이에 성제가 노하여 주은을 끌어내 죽이려 하자 어전의 난간을 붙잡으며 버텨 난간이 부러졌다. 좌장군 신경기가 머리를 찧어 피를 흘리면서 직간해 주운을 구했는데, 훗날 주운의 말이 옳음을 깨달은 성제는 부러진 난간을 그대로 두게 해서 직간하는 신하의 본보기로 삼게 했다. 이는 ‘한서-주운열전’의 이야기다.
정치권은 이를 주목해야 한다. 만약 대선승리만을 위해 여야가 이념, 지역, 세대, 계층 간의 갈등만을 증폭시키고 공동체의 화합을 이끌어낼 정책방안을, 특히 복지확대와 재정건전성, 그리고 경제민주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면 한국 경제의 앞날은 더욱 불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라면 그의 직간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왜 우리에게는 권력이 위임받은 것임을 인식하는 정치인이 많지 않다는 말인가. 국민은 왜 5년에 한 번씩 크게 실망을 해야만 하고 스스로부터 발현하는 권력이 뒤틀려 모욕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용납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민주주의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해야 한다.
오늘의 병든 정치와 경제를 치유하고 건강한 내일을 기약하면서 정치불신의 벽을 넘어서려면 이 나라의 정직한 사람들의 직간을 듣고 대화하려는 정치인들의 수가 많이 늘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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